어떤 자살은 질병사다

얼마 전까지 서경식의 <책임에 대하여>를 읽다가 (어려워서) 놓고 있던 중이었다.



“(148)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요? 자국, 자민족이 자행한 식민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채로 포스트 콜로니얼 연구가 성립될까요? 식민주의 비판이라는 의식이 박약하고, 결핍된 포스트 콜로니얼 연구는 단지 ‘지적 유행’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고, 나쁜 경우에는 의도하지 않게 국가와의 공범 관계를 형성할지도 모릅니다. 조선의 통일 운동과 오키나와 반기지 투쟁 등 전체적으로 제3세계의 민족 해방운동을 ‘내셔널리즘’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만 자족하면서,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극복하려는 데 대한 관심은 희박한 듯 보입니다. 내가 박유하 씨를 예찬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언설에서 느끼는 위화감은 그런 것입니다. (중략) 1990년대 이후에 냉전이 무너지고 포스트모던의 사상 조류가 일본에 들어왔을 때에 그것을 섭취하여 흡수하지 못한 채, *결국 타자비판 도구로 삼았지만 자기비판 도구가 되지는 못해서* 일본 사회의 반동화, 리버럴파의 퇴락, 아카데미즘의 형해화……로, 전부가 발을 맞추어서 진행하는 듯한 생각이 들어요. 예컨대 리버럴파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우치다 다쓰루 씨가 있지요.” - <책임에 대하여>, 서경식


일본의 지성계의 상황이 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내 프랑스 현대 철학 독서의 한줄기 빛이었던 일본의 미소지니 꼰대 할배 우치다 센세🤪를 꼬집어 조근조근 씹어 주시는 서경식 선생님의 혜안에 피식피식 웃긴했다.)


음.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호기심이 생겼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더 정확하게 적자면 일본의 지식인이 고안하고 황국신민이 동조한 서구를 선망했던 제국주의와 한국에서 나고 자란 국민(K-장녀...)으로서 내게도 뿌리박혀 있는 선진국을 따라잡고자 하는 심성(?)에는 어떤 간극과 어떤 다름이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사실은 궁금하지 않다. 거칠게. 혹은 잔인하게. 나는 이미 “거기엔 다름이 없다”는 결론 내린 채. 이런저런 책들을 뒤진다... (일단은 내려놓는 가장 가혹한 전제. 이건 페미니즘 책을 읽다가 터득한 어떤 방어기제일지도.)



“(23) 일본의 제국주의 실행은 좀 복잡하다. 일본은 유럽식(영국과 프랑스)을 벤치마킹하면서도,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변용을 했다. *일본은 스스로를 ‘동아시아의 영국’으로 상정*하고 영국식을 모방했다.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 (중략) 일본은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보편적인 방식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일본이 직면한 고민이 있었다. 자신들과 아시아인들 사이에 피부색과 문명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중략) 일본인은 자신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차이가 없고, 분리 또한 쉽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여 자신의 우월성과 제국 건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고심했다. 한 가지 방법은 조선의 후진성을 부각시키고, 문명화의 필요성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 박종성 -


“(29) 슈미드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식민주의가 정치적 의제의 차원에서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한일 모두 문명개화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비슷한 목표에 매진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일본 당국은 한국의 민족주의적 자기비판 양식을 손쉽게 채택해서, 문명개화라는 동일한 원칙하에 식민 착취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애국의 계보학>, 실라 미요시 야거


“일본이 대일본 제국이라는 다민족 제국이던 시대에는 지배층이 일본 민족(야마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대만인 등 식민지 신민臣民들에게 야마토 민족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식민지 신민을 ‘이등 국민’으로 취급하고 심하게 차별하면서 그 차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패전을 전후해서 일본 지배층은 ‘국체’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옛 식민지 출신자들을 내버리고 야마토 민족에 의한 단일민족 국가로서 전후 일본을 재출발시켰습니다. 여기에 전후 일본 ‘국민주의’의 기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략).” -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서경식 -




올해 1월, 케이트 만의 <남성 특권>을 읽고 인셀의 심리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다가 그건 나에게도 있다는 결론에 가닿고 소스라친 나머지 (나의 인셀스러움ㅋㅋㅋ) 차마 글로 정리하지 않은 것.


인셀의 심리(라고 쓰고 내게도 있는 심리라고 읽는다. 나는 야, 여자 인셀). 자신의 내면 안에 사회(다수)가 암묵적으로 허락한 위계를 짓고. 그 위계에 따라서 인간(이 자리에는 숱한 정상성 혹은 규범이 들어간다. 남성, 백인, 황국신민, 국민, 정규직, 중산층, 스카이, 정상인... )/비인간을 분류하고. 라벨링, 규정하고. 혐오하거나 배제하거나 지배할 명분을 스스로가 멋대로 ‘정당화’한 채. “다들 그렇지(나 같지) 않나?”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해 버리는” 인간이 인간이기에 지니는 어떤 속성에 대해. (이게 N번방이 가능했던 까닭 아닐까?) 


동시에 비인간들(특히 여성)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옆에 있는 데. 연결되어 있는 데. 자신이 비인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멍청함. 어쩌면 스스로를 보지 않으려는 거대한 억압에 대해. 그러니 혹은 그러나. 운이 나빠. 아마도 삶이 짓궂어 어쩔 수 없이 우연하게 다른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나는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보고 싶지 않았던 심연. 두려움. 도망치고 싶음. 자기기만.


에 대한 이야기로.


나는 그런 방식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개인적인 체험>을 읽었다.

“(193) 하지만 내 아내에게서 비정상적인 아기가 태어난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 *우리에게 책임은 없어*. 그리고 내가 아기를 그 자리에서 눌러 죽여 버릴 만큼 터프한 악한도 아니지만, 아무리 치명적인 증상을 가진 아기라도 의사들을 총동원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어떻게든 살려내 보려고 할 정도로 터프한 선인도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아기를 대학 병원에 맡겨두고 자연스런 쇠약사를 선택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지. 그러던 끝에 *자기기만이라는 질병*에 걸려 쥐약을 먹고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든 시궁쥐처럼 되어버린다 한들, 그것도 내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개인적인 체험>, 오에 겐자부로-


그리고 내부자가 아닌 외부인. 아니, 외부인도 아닌 코리안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그의 책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에서 작가 오에를 ‘애매한 일본인’에 저항한 지식인(일본에 몇 없는) 계보에 두고 검토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반동기’는 보수파와 우파들만의 작품이라기보다 오히려 일본 국민 다수의 ‘국민주의’적 심성이 이들을 크게 이용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전쟁 책임·식민지배 책임을 철저히 파고드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을 ‘민주주의자’로서 도덕적으로 높은 곳에 올려놓고 싶은, 동요하는 머조리티의 이율배반적으로 분열된 소망*이 이 ‘국민주의’입니다.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해낸 ‘아시아여성기금’이나 그것을 이어받은 2015년 말의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바로 그러한 모순(‘애매함’)을 보여주는 흔한 사례겠지요.

미국의 ‘핵우산’에 스스로를 의탁하면서 자신들이 ‘유일한 피폭국’이며 ‘평화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애매함’의 또 다른 사례일 겁니다. 일본 국민 다수는 이 ‘애매함’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평화 애호가이며, 자국은 평화 국가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서경식


지지난 달 이 책을 읽고서 내가 독서 앱에 남겨놓았던 단상은 아래와 같다.


“일본에서 살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70대 한국인 택시 기사의 내면화된 애향심과 분열된 애국심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애국주의-> 가족주의까지 연결되는 내면화의 흐름 잡아채서 쓴 부분은 보통 훌륭하지가 않음. 


서경식의 위치는 사유를 치열하게 해야 하는 위치였을 거다. 멈추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사유하는 사람이라 느낌. 무튼. 깊었다. 때때로 서슬퍼렇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내가 일본의 지배 계층, 국민주의적 심성에 물든 국민, 혹은 이 책에서 계속 때리는 ‘진보적 리버럴’이었다면 그의 입을 막고 싶었을 듯. 그런데 서경식은 일본에서 대학교수다. 한국에는 이렇게까지 불편한 지식인이 있나? 그게 일본 사회의 어떤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혜택(?)을 입은 그가 피해자로서 가해자 집단에게 가해 의식을 가지라! 지적하는 것은 대단한 결기와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해 집단이 셀프로 “우리 모두가 애매한 죄인입니다”라는 종류의 말은 아무 말도 아닌 게 맞다. 그것은 피곤한 갈등을 평안하게 봉합시키는 비열하기까지 한 장치로도 보인다. 실은 거기까지 염두할 필요가 없는 위치성에서 어쩔 수 없이 게으른 사유가 나온 것일 테지. 일본의 메조리티들이 공유하고 싶어 하는 은근 징그러운 품위 유지의 일면도 알게 되었음.


어떤 부분은 한국인으로서는 듣기 좋았는데, 서경식이 말하는 반일과 한국인의 정서에 있는 반일주의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른 듯. 일본 내부의 상황은 전혀 몰랐는데, 한국과 어딘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차라리 들었다. 서경식 더 읽어보겠으.”


더 읽어보겠다고 하고, 또 밀어두고 다른 책 읽느라 바빴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선생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이상하고 착잡한 마음이 든다. 생각 자체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어떤 ‘지성’이라 이름 붙인 것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존재 자체가 다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몸에서 나온 사유가 이토록 뜨거우면서 서늘해지기까지 그 지성을 가다듬는게 얼마나 어려웠을까하고 생각했다. 불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제거해버리고 싶어 하는 눈초리만 그득해져가는 한국과 일본의 현실에서. 선생의 몸이 강건하게 버티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 자체가 염치없었구나. 하게 되는.


언젠가 코리안 디아스포라 가족의 일대기를 다룬 <파친코>라는 소설을 읽고 친구와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트랙백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3981035 참고) 그때 나는 노아의 자살을 질병사(우울증)라고 썼다.


글을 끝내는 시점에서 왜 서경식 선생님과 노아가 겹쳐지는지 모르겠다. 더 써볼까.


내 위치에서 나를 보는 훈련. 페미니즘을 읽는 것은 지금까지 익히고 배워왔던 (남성) 언어와 내 존재가 얼마나 불화하는지를 굳이굳이 선사시대까지 꺼내와서 재독해 하는 일이었다. 어떤 남자 철학자(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까지 했는데.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언어로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그 은유마저 penis인 pen으로 자신을 규정해왔던 여성주의 언어의 역사를. 그들을 읽던 나는 나의 언어를 내가 만들어야 하는 까닭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힘들지만 보람있는 과정이었다.)


재일 조선인 노아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1세계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아마 문학에서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한 언어(권력, 조직, 집단, 가족, 사람...)가 나를 살해해온 바로 그것일 때.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을 때. 아니. 도망쳤는데 결국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휘몰아치는 낙담.을 어떤 경험에 기대어. 노아를 내 맘대로 해석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때 그렇게 적었다. 노아가 썼다면 어땠을까? 일본어로 썼다면?


나는 서경식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은 없으며, 이제서야 막 그의 저서를 읽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런 선생이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했으며 일본어로 사유했다는 이웃들의 댓글을 보면서 당연하다 느끼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번역된 책에서 느낀 그의 사유가 너무도 깊었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었을까.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삶.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이니치.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마이너리티 지성.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그 복잡함에 대해. 그 치열함에 대해.


이제서야 책을 읽는 재미를 알게된 나는 책에서 좋은 사람을 만날 때 정말 기쁜데.

아주아주 좋은 사람을 채 알기도 전에 떠나보낸 것만 같다.

몰랐던 것이 부끄럽다.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바쁘다고만 생각했다.


그의 사유가 담긴 책을 읽으면서 그의 글에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서경식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는 사유들이 페이지 마다 빼곡했다.  


읽는 것으로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젠 안다. 그래서 부단히 읽기 다짐해본다.

서경식 선생님. 영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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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21 0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경식,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단발머리 2024-01-13 13: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이래서 공쟝쟝님 팬입니다. 알아본 나의 안목을, 내가 칭찬합니다.

탈식민주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그러니까 식민지였던 나라의 인간도 아닌 여성인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 부분이 많네요. 쟝님이 링크해준 책을 좀 읽어보고 오겠습니다.
반성하는 지식인의 마지막 계보라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분이 일본 대학의 교수인건 맞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절대 일본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엔... 그는 영원히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어에 서툰 한국인이요. 그가 가진 위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 자리가 그를 그렇게 이끌었다고 전 생각해요. 우리 인생에는 겪을 수 밖에 없는 난관이 있고 이런 사유는 그래서 가능할 수도 있었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쟝님이 추천할 때 얼른 읽을것을.... 소식을 듣고 나니 많이 후회가 되네요.....

공쟝쟝 2023-12-21 09:57   좋아요 2 | URL
저는 잘은 모르지만 자이니치에 대해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때 가네시로 가즈키 많이 읽음 ㅋㅋㅋ)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영화 박열을 보고 후미코에게 잠깐 눈길이 간 적이 있고요. (일본 천황제에 반대한 일본안의 무국적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충격)

책을 읽을 수록 점점 소속(?)이나 이념이 아니라 한 사람을 보게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경식의 책에서는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끝까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려는 그런 맘을 느꼈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그리고 누가 뭐래든 저는 제가 한국사람인게 좋습니다. ㅋㅋㅋ 포스트 콜로니얼 어쩌고해도. 나는 고려거란전쟁 10분에 몰아보기 하는 여자ㅋㅋㅋㅋ

2023-12-21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2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수 2023-12-21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공쟝쟝 2023-12-22 10:56   좋아요 2 | URL
유수님! (댓글 기쁨)

서곡 2024-01-03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새해 복많이 많이 받으세요!!

공쟝쟝 2024-01-03 17:12   좋아요 1 | URL
든든한 레퍼런스 서곡님 2024년에도 폭풍 자료 업데이트 잘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곡 2024-01-03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민망합니다 ㅋㅋㅋ 조은 저녁 되세요 감사합니다 ~~